유럽연합(EU)이 축산업만을 대상으로 한 첫 중장기 전략을 내놓았습니다. 그동안 축산 관련 정책은 공동농업정책(CAP), 유럽 그린딜(European Green Deal), '농장에서 식탁까지(Farm to Fork)' 전략 등 다양한 정책 틀 안에서 하위 개념으로 다뤄지며 주로 '환경 규제'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축산업 자체의 경쟁력과 가치에 촛점을 맞춘 단독 중장기 전략인 'EU 축산전략'을 집행위 차원에서 공식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EU 집행위원회는 최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EU 축산전략(EU Livestock Strategy)'을 채택하고, 지속가능하면서도 경쟁력 있는 유럽 축산업의 미래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집행위는 이번 전략을 "이러한 형태로는 최초의 전략(the first of its kind)"이라고 설명하며 축산업의 역할과 가치를 새롭게 재정립했습니다.
이번 전략은 단순히 축산업 지원책을 제시한 문서가 아닙니다. 최근 몇 년간 환경 규제 중심으로 흘러왔던 유럽 축산정책의 무게중심을 식량안보와 경제 경쟁력, 농촌 유지, 전략적 자율성까지 확장한 정책 전환 선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실제로 집행위는 축산업을 유럽 식량체계의 핵심 축으로 규정했습니다. 축산업은 약 700만 개의 일자리를 유지하고 연간 4,000억 유로 규모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일 뿐 아니라, 농촌 공동체를 유지하고 안정적인 식량 공급망을 뒷받침하는 전략 산업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지정학적 불안정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축산 생산기반은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과도 직결된다고 평가했습니다. 동부 국경 지역에서 축산업이 유지돼야 농촌 공동화를 막고 국경 지역의 지속가능성도 확보할 수 있다는 점도 이번 전략에 반영됐습니다.
환경 목표는 유지…접근 방식은 달라졌다
이번 전략이 환경 정책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EU는 앞으로도 탄소중립과 메탄 저감, 생물다양성 보전 등 환경 목표를 유지한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이를 달성하는 방식에서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동안 축산은 메탄과 질소 배출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며 환경 규제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질소오염 저감을 위해 축산농가 매입 정책이 추진됐고, 일부 회원국에서는 가축 감축 방안이 검토되면서 축산업계의 반발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략은 축산의 생산기반을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기술 혁신을 통해 환경 부담을 줄이겠다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집행위는 저메탄 사료첨가제와 저배출 품종 개발, 정밀한 온실가스 측정기술, 분뇨 관리 개선 등 혁신기술을 적극 지원하고, 과학적 데이터에 기반한 배출 관리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방침입니다. 일률적인 생산 축소보다 기술 발전을 통해 생산성과 환경성을 함께 높이겠다는 접근입니다.
이는 축산을 환경 문제의 원인으로만 바라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지속가능한 식량 생산의 핵심 산업으로 재평가하려는 시도로 해석됩니다.
세계 축산정책도 같은 방향
EU의 정책 변화는 다른 축산 선진국들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미국은 생산 기반을 유지하면서 분뇨관리와 사료관리 등 기후 스마트 농업 기술을 활용해 온실가스 감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뉴질랜드도 농업 메탄 가격제 도입에서 한발 물러선 뒤 메탄 저감기술 개발과 보급 중심으로 정책 방향을 조정했으며, 호주는 저메탄 사료와 탄소크레딧, 유전개량 등을 통해 생산성과 환경성을 함께 높이는 정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결국 주요 축산국들의 정책은 사육 규모를 줄이는 접근보다 생산기반을 유지하면서 기술혁신으로 환경 부담을 낮추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번 EU 축산전략은 우리나라 축산정책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습니다. 탄소중립을 추진하더라도 단순히 사육 규모를 줄이는 접근보다는 저탄소 사양기술과 정밀축산, 분뇨 자원화, 생산성 향상 등을 통해 환경성과 산업 경쟁력을 함께 높이는 방향이 국제적인 정책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전략은 축산을 기후변화 대응의 대상이자 동시에 식량안보와 지역경제를 지탱하는 기반 산업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향후 유럽 농정은 물론 세계 축산정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근선 기자(pigpeople100@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