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F 백신 기술은 이미 국경을 넘었는데, 상용화는 규제라는 담장 안에 갇혔습니다. 정부의 미온적 태도가 세계 최초 글로벌하게 사용될 수 있는 'K-백신'의 불씨를 꺼뜨리고 있습니다.
ASF가 한돈산업의 일상을 흔든 지 수년이 흘렀습니다. 올해는 근간까지 위협하고 있습니다. 2026년 현재, 전국적인 확산세는 멈추지 않고 있으며 농가의 가슴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습니다. 살처분과 이동제한이라는 '사후약방문식' 방역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최근 감염멧돼지가 울산에 이어 경북 고령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질병의 위기 대응에서 유일한 게임 체인저는 ‘백신’뿐입니다. 이미 '구제역'과 'PMWS(써코)' 상황에서 우리는 몸으로 배웠습니다. 여기서 냉정하게 묻고 싶습니다. 과연 대한민국은 ASF 백신을 가질 자격이 있는가 말입니다.
세계는 '연합군'인데, 우리는 '각자도생'
유럽의 행보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빠릅니다. 스페인의 백신 기업 '히프라(HIPRA)'를 필두로 한 유럽연합(EU)의 'VAX4ASF' 프로젝트(홈페이지)가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4년차 계획 중 벌써 3년 차에 접어들며, 본격적인 동물 대상 효능 및 안전성 실험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17개 파트너가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EU의 전폭적인 행정·재정적 지원이 뒷받침된 결과입니다. MSD가 주도하고 있는 VACDIVA(홈페이지) 프로젝트도 있는데 역시 EU 자금 지원을 받아 한창 가동 중입니다(관련 기사).
반면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떠한가요? 코미팜, 케어사이드, 중앙백신연구소 등 국내 3사는 세계적 수준의 후보주를 확보하고도 국내에 '실험할 마당'이 없어 베트남과 필리핀의 농장을 전전하고 있습니다. 생물안전 3등급(BSL3) 시설은 턱없이 부족하고, 그나마 있는 공공시설조차 민간기업이 활용하기엔 문턱이 너무 높습니다. 우리 기술로 만든 백신을 정작 우리 돼지에게 먼저 맞히지 못하고 해외 임상 결과만 기다려야 하는 서글픈 역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몇몇 기업은 아예 다국적 기업에 기술 사용 허가권 판매를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안전'이라는 이름의 무책임한 방치
정부는 늘 "안전성과 유효성 검증이 최우선"이라는 원론적인 답변만 되풀이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검증'을 위해 정부가 판을 깔아준 적이 지금까지 있는가 묻고 싶습니다. 미국 USDA와 다국적 기업들은 시설 기준을 완화하고 패스트 트랙을 가동하며 상용화 기간을 단축하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 관계 당국은 기업들의 절규 섞인 호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수적인 행정 절차와 규제라는 성벽 뒤에 숨어 있습니다. 나라는 선진국인데 행정은 여전히 후진국에 머물고 있습니다.
기술력은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 기술을 산업화로 연결할 '국가적 의지'가 안보입니다.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는 국내 기업들의 사기를 꺾는 것을 넘어, 미래의 백신 주권을 통째로 상납하는 꼴입니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우리는 막대한 세금을 지불하며 유럽 혹은 미국산 백신을 수입해야 하는 처지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야생멧돼지용 미끼백신이 먼저일 듯합니다.
골든타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 반도체가 그랬고, 조선, 원자력, 방산, 자동차 등이 그러하듯이 백신 또한, '자격'이 있는 국가가 먼저 갖습니다. 개발의 위험을 민간에만 떠넘기고, 방역 실패의 책임을 농가에만 묻는 국가에게 세계 1위의 영광은 사치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럽과 미국의 실험실에서 상용화의 문턱을 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부는 이제라도 '규제 기관'이 아닌 '전략적 파트너'로서의 본분을 자각해야 합니다. BL3 시설의 파격적 우선 개방, 임상 절차의 획기적 단축, 그리고 민관 합동 전문가협의회 구축이 즉각 이뤄지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ASF 백신을 논할 자격조차 잃게 될 것입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오지만, 승리는 끝까지 밀어주는 국가의 몫입니다.
이득흔 기자(pigpeople100@gmail.com)


